성경은 하나님의 정치 서적이다.

본문: 창 1:1

작성: 김광종 (#178)
작성시간: 2021-02-27 11:31:12
수정시간: 2021-02-27 18:5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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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많은 부분이 정치인들에 의해 기록되어졌고, 정치와 관련되어 기록되어졌다. 일례로 시편의 거의 절반은 다윗 왕이 쓰신 것으로 전해진다.

잠언은 솔로몬이. 그리고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도 왕과 통치, 정치 이야기다. 많은 선지서들은 왕들과 이스라엘 나라의 정의와 불의에 대해 다룬 말씀들이고, 그 선지자들은 왕들의 불의를 지적하시다가 참수당하셨다.

모세오경은 더욱더 그렇다. 피상적, 관념적 이야기가 아니라, 천지 창조와 사람의 기원, 동식물의 기원, 역사, 그리고 나라들, 족보들 이야기다. 거기에 한 국가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체계와 법령 등에 관한 이야기이며, 전쟁사이다.  

창세기를 쓰셨다고 간주되는 모세는 종교지도자가 아니다. 아론이 종교지도자이다.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 교육을 받은 정치가이셨다.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 상태에서 40년을 지냈다. 그는 스스로를 자기 민족을 구해낼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일이 실패하고 그는 광야로 내쫓겼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더욱 완벽한 목자의 훈련과 온유한 지도자의 능력을 갖추어가게 된다. 이렇게 모세 오경도 정치 지도자에 의해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과 유일하게 대면하신 정치 지도자 모세이셨다.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가였다. 마치 왕 앞에 아무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아하수에로 앞에 아무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왜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할까? 하나님의 주권, 소유권을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세상의 왕들에 대해, 세상의 거짓 신들에 대해, 세상의 잘못된 사상들에 대해, 분명하게 그 소유권, 주권, 왕되심을 주장하시는 바다.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되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바와 일맥 상통한다.

지금의 세상은 토지와 자본, 노동에 대해 지주, 자본가, 노동자 등, 인간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신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의 모든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의 기본법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사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바로 이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다.

이집트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았을 때도, 이 소유권을 오해한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그 소유권을 밝히 보여주시는 일을 하셨다. 가나안 땅의 소유권도 하나님께 있다.

성경이 일반 종교 서적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왜 완전히 종교화된 기독교가 되었을까! 물론 제사에 관한 말씀들도 많다. 하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수양의 기름보다 청종과 이행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러한 종교화된 사회를 비판하시다 고초를 당하셨다. 하나님, 하느님은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공평과 정의를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가식적 종교 행위로 위장했다.

이는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천국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천국이 바로 의로운 사람들을 세우시는 일임을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다시 자신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은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이 실패한 이 세상에 이젠 아담의 후손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즉 왕의 자격으로 오신다. 제사장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리고 사탄과의 싸움을 완벽하게 승리로 만드시기 위한 사탄과의 권력 투쟁을 선하게 이끄신다.

마치 다윗 왕이 훌륭한 장수들을 세워서 악한 나라 블레셋, 그 백성과 이웃 나라를 착취하는 권력자들과 싸우시는 것과 흡사하다.

예수님은 돌아다니시면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구해주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 진리를 얻지 못해 고통 겪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깨닫게 해주셨다. 이 사람들은 당대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부자들이 돌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솔로몬이 지혜를 베푸시는 것과 흡사하다. 시바의 여왕까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다. 솔로몬의 지혜의 최초의 대상은 부자도 권력자도 일반인도 아니었다. 창녀 둘 사이의 문제였다. 창녀를 극도로 싫어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녀의 탄원 문제를 솔로몬의 최초의 업무로 주셨다. 이스라엘 왕인 솔로몬으로부터 일천 번제라는 공물을 받으신 만왕의 왕께서 그 지혜를 주신 분인 하나님이신데, 그 지혜의 첫 판결 대상을 창녀로 두게 하셨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창녀와 세리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창녀는 이스라엘의 가장 낮은 자였고, 비천한 레미제라블이었다. 코제트의 엄마 팡틴처럼. 종교지도자들은 이 창녀들을 비웃었지만, 정치지도자인 솔로몬은 이들의 탄원을 받아들이고 재판정으로 초대했다. 예수님 당시 창녀들을 무시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이들을 잃어버린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주셨다. 모호한 종교적 도덕이 아니라 왕으로서 행동하셨다.

자크 엘룰식의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에 나타난 애매모호한 정치와 종교 사이의 방식이 아니라, 명확하게 정치적으로 행하셨다. 이 점에서 자크 엘룰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고, 서양 신학이 문제를 겪었고, 미국의 신학은 더 큰 문제를 잉태하고서 한반도에 반쪽짜리 복음을 전함으로써 큰 왜곡을 가져왔다. 마치 존 로크의 자유와 평등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너던 메이 플라워호에서 평등을 빠뜨리고 허드슨 강 입구에 자유 여신상만 세워놓았다고 지적하는 루이스 하츠의 생각처럼.

플라톤의 철인 정치다. 철학가적인 정치가 오히려 예수님의 정치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다음에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받으신다. 그리고 다시 헤롯과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14장에 나온다.

왜 마태, 즉 세리 마태, 삭개오는 이런 배치를 하셨을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려 오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셨다. 그 세례 요한이 당시의 분봉 왕 헤롯의 악행을 지적하시고 감옥에 갇히셨다가 헤롯에 의해 목베임을 당하고 죽는다. 이슬람 참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 일에 헤로디아와 그 딸이 관여되었다. 마치 이세벨을 보는 듯하다. 이세벨과 아합으로 인해 엘리야는 큰 고통을 겪은 선지자이시다. 그들의 악행을 지적하셨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까지 빼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이 엘리야를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함께 만나신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와 싸운 이스라엘 출애굽의 지도자이시다. 이제 전선이 국제화된다. 이스라엘과 애굽의 싸움. 이는 요즘도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 등 주변국과의 갈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굽의 바로는 신이었다. 신적 권위를 가지고 이집트를 통치했다. 출애굽 과정에서 바로는 하나님께 대적하다가 홍해에 빠져 죽게 된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재훈련을 받은 후 40년 만에 가나안 땅으로 침공해서 그 7부족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민족이 먼저 만들어졌고, 영토를 차지하고 주권을 세운, 명실상부한 국가가 된다.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세우신 이유는 세상 모든 나라에 모범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바로 천국의 좋은 씨였다. 그런데 여기에 또 가라지가 뿌려졌다. 이스라엘에 악한 왕들이 나왔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모범 국가가 아니라, 엉망진창인 국가로 만들었다.

메시야, 즉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겹친 왕들인 헤롯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로마로는 여러 황제들, 그리고 빌라도에 이르기까지 왕의 진면목을 두고 투쟁이 벌어졌다.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지만, 여우 헤롯과 독수리 무리같은 빌라도와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미움이 되었고,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그래서 이집트로 피했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신다. 마치 이스라엘 즉 야곱이 그 아들들과 함께 그 숫자가 불기까지 이집트로 갔다가 400여년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거기에 나라를 세우신 것과 비슷하다.

예수님은 자기 나라를 순행하시면서, 왕들은 이렇게 한다.,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선한 목자로서. 플라톤의 정치가라는 책에 보면 이런 목자와 통치자를 비교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도 당시의 권력자들, 헤롯과 빌라도, 그리고 이스라엘의 국회의원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다. 당대의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다.

그런데 이 돌아가심은 예사의 죽음과는 다르시다. 왕으로서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도 정치 권력에 의해 고통을 받으셨는데, 돌아가시는 것도 이렇게 정치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 권력이 바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온 가라지들이었다. 사탄이 뿌린 씨앗, 더러운 씨앗이었다.

사탄은 더러운 귀신들의 대장이고, 악한 정치 권력을 세운 자이다. 사탄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탄은 은밀히 제안한다.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고. 정치 권력, 수많은 왕들이 이 꾀임에 넘어가서 악한 왕들이 된다. 헤롯, 빌라도도 다 이런 꾀임에 넘어간 정치인들이었다.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이시다고 하나님께 칭찬 받았던 다윗왕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정치 행위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종교 행위가 아니었고, 하나님 나라의 사법 질서에 부응한 행위이셨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회생했다.

하나님 나라의 사법 질서의 사면을 위해, 그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자기 국민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자기 국민들을 그 죄의 형벌에서 사면하시고, 자기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 국민들이 자기처럼 살 수 있도록,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대신 돌아가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종교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즉 자기 백성, 자기 국민들에게 내리실 벌을 스스로 받으신 사법적 행위이다. 대통령도 사면권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사면권을 그냥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통해 대속하신 후에 사면권을 행사하신 것이다. 사탄의 입을 막기 위한 공의로운 정치 행위이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심으로써 자기가 삶과 죽음 모두에서 권력자이심을 증명하셨다. 이로써 사탄의 권력은 산산조각나게 되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직도 가라지들이 많다. 때론 우리 안에 아직 남은 죄가 우리를 사탄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넘어져도 또 일어나서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스스로의 죄와 싸워야 한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이 세상에 의로운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 좋은 씨를 우리도 계속 뿌려야 한다. 예수님의 정치 행위를 본받아 우리도 여전히 악한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고 하는 김일성 일가의 독재나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의 독재나, 독재권력과 맞서싸웠다는 도덕성을 가졌다고 하는 민주화 세력의 타락이나, 가라지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심지어 다윗 왕조차도 그 모든 것이 평안하게 된 후에 자기 부하, 그것도 너무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야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 일로 다윗은 자기 아내들을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게 되고, 아들이 딸을 강간하고, 아들들간에 죽이는 일들이 벌어진다.

최고의 선왕이었던 다윗조차도 이런 악한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결국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 되실 수 있고, 예수님은 다윗과 다르게 완벽하게 왕직을 이 땅에서 수행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잘 수행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완벽한 왕이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며, 우리는 이 왕을 본받아 지방자치형태로 수령의 일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삶이 어떠하셨는지, 예수님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인지 보여준 선지자들이며, 또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할 분들이시다.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듯이, 예수님의 피로 낳은 열두 사도들은 열두 지파를 세우고 제자를 양성하며 천국을 이루는 일에 크게 기여하셨다. 우리들도 이 분들의 희생으로, 복된 소식, 굿 뉴스를 받고 이 거룩한 나라의 혁명 사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바로 우리 양 옆에는 헤롯과 빌라도 같은 자들이 통치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북한이 그런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도 우리가 접수해야 한다. 한국 기독인들은 주변 나라들에 이런 선교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의료 선교, 문화 선교 등을 하고 있지만, 이젠 정치 선교가 이뤄져야 한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했다면, 우리는 일본의 서민들과, 재일교포들을 살려내는 정치를 일본 땅에서도 할 것이다. 공의 정치, 하나님 경외 정치는 아담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창세기는 이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의 기독사회당은 지역정당이다. 독일 기독 민주당, 즉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은 전국 정당이고, 양당이 총선에서 연합하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라는 말씀과 연계되어 해석해야 한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달리, 임의로 주관하는 세상의 사탄의 권력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셨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만인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시면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일을 여기 창세기 1장 1절에 쓰시고,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번 그 분으로서 통치하심, 섬기심을 드러내시면서 만왕의 왕, 즉 정치가이심을 드러내신다. 이 분의 후손인 우리가 정치가로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이딤에게 주신 명령, 다스리라는 명령은 정치가로서 살으라시는 명령이시다. 종교인으로서 살으라시는 것이 아니다. 이 종교나 저 종교나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유일하신 왕, 만왕의 왕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를 느부갓네살도 다니엘서 4장에서 말씀하신다. 왕인 느부갓네살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왕되심, 정치가되심을 증거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을 곡해한 서양 신학은, 마치 유대인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모세의 말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잡아죽인 것처럼, 왜곡된 신학을 이 땅에 펼쳤고, 그 왜곡이 가장 심한 나라가 대한민국이 되었고, 거기에 많은 목회자들이 눈 먼 자들로서, 눈 먼 자들에게 배운 바를 또다시 교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자기들보다 더욱 악하게 만들고, 자기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도 막아버리고 있다.

 

irparty.com  김광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