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의 송사에서 그에 불리하게 부풀리지 말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것이 보다 맞다고 봅니다

본문: 출 23:3

작성: 김광종 (#178)
작성시간: 2021-03-07 12:32:44
수정시간: 2021-03-10 12:23:38
조회수: 632



이 구절 해석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적당한 사례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기 22장과 23장을 앞뒤로 보면 더욱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고, NIV나 WBC 등에서 보이는 번역은 오히려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한글 성경들도 가난한 자를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라는 뜻들로 번역되어 있는데 아주 잘못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즉 낮은 자의 재판에서 높은 자의 편에서 부풀려서 낮은 자를 곤경으로 몰아가지 말라시는 뜻으로 번역하고 해석함이 맞다고 본다.

나봇에 대해, 이세벨이 없는 일들을 만들어내서 부풀리고, 그 죄악이라고 부풀리고, 거짓 증인들을 데려다가 거짓 풍설을 만들고,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렇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넘겨주는 일이 벌어졌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주지 말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들은 이런 점에서, 성경 전체로 보나, 출애굽기 앞뒤 장들로 보나 명백한 오류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누가 가난한 자, 즉 낮은 자여서 그 권리를 박탈당하고 가난해진 자의 편을 들어주겠는가! 그 가난한 자와 송사를 벌이고 있는 반대편 사람은 높은 자이고, 부자이고, 권력자이다. 그런데 연약한 자, 낮은 자, 비천한 자의 편을 편벽되이 들어주면 그 부자, 권력자, 높은 자가 가만히 두겠는가!

따라서 이는 합당하지 못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출애굽기 23장 1-3절의 NIV 번역이다

23 

“Do not spread false reports. Do not help a guilty person by being a malicious witness.

“Do not follow the crowd in doing wrong. When you give testimony in a lawsuit, do not pervert justice by siding with the crowd, and do not show favoritism to a poor person in a lawsuit.

예수님의 죽음에서도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에 대한 악한 증거들을 내놓게 한다. 대제사장 무리들이.

가난은 신명기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공동체가 해결해주어야 할 의무다. 강제 조항이다. 자선을 베풀어도 되고 안되고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구별하실 때,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를 심판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이런 가난한 자의 재판이 왜 생겼겠는가! 가난한 자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재판인가! 그렇지 않다. 이 재판은 부자가 만든 것이다. 가난한 자는 재판할 기력도 없다. 야고보서에서 이 말씀이 나온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재판정으로 끌고 갔다고. 예수님이 인용하신 한 과부처럼 악한 재판장을 괴로울 지경으로 만들 정도로 호소했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 가난한 자의 권리를 박탈한 자에 대한 정의의 호소다. 그런데 이 호소가 이 재판에서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기에 이 과부는 이토록 죽을 힘을 다해 악한 재판장을 괴롭혔던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처럼,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고아와 과부의 것을 토색하는 자들에 항거하는 재판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와 관련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고아와 과부의 것을 빼앗는 자들이라고.

누가 가난해지는가! 고아, 과부, 나그네, 그리고 고리대금에 노출된 자, 그리고 희년에 자기의 천부적 토지를 다시 돌려받지 못한 자, 저당물로 자기 옷마저 빼앗긴 자. 이 비참한 사람들 편을 편벽되이 들어주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 왜 이렇게 번역되어서 기록되었을까! 마치 부자 편도, 가난한 사람 편도 들어주지 말고, 공평하게 판단하라는 의미로 이 번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사도 요한이 왜 요한계시록 말미에 가감에 대한, 왜곡에 대한 저주를 넣으셨을까! 부자와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특히 성경조차 자기들의 재산에 해가 되지 않도록 변경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잘 안되니 아예 장로들의 유전을 따로 만들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런 행위기 성경 번역의 역사 가운데 잘 드러난다.

성경은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favoritism의 연속적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조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신약에서조차, 그 부자 청년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네 재물을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셨다. 무슨 근거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하셨는가!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야 했는가! 왜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왜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나사로 앞에서 망신을 당하며 처절한 상황에서, 그가 많은 것을 누렸던 세상 삶과 달리, 물 한방울을 구하는 처지로 전락했는가! 이것을 예화로 드신 예수님은 공산주의자도, 좌파도 아니신, 창조주 하나님,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이 출애굽기 23장 3절은 부자들, 가난한 자들의 것을 토색한 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마땅히 돌려줘야 할 것들을 돌려주지 않은 자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이혼증서 같은 모세의 법이었다. 모세가 정말 이런 문구를 다셨다면, 이렇게 밖에 번역될 수 없는 말씀으로 원래 그러셨더라도, 예수님은 너희의 악함으로 인해 그런 것이지 원래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답하셨으리라 본다.

언젠가 헨리조지스트들과 토론회를 하다가, 한 토론자가 이 구절을 들어서 가난한 자 편을 편벽되게 들어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성경을 100독 넘게 한 나로서도, 항상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을 지날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1938년에 한글 개역 성경이 3권으로 나올 때는 일제 시대였다. 일제는 이미 카톨릭과 개신교의 미사와 예배에 대해 조정했고, 군사 물자를 헌납받고 있었다. 이 1938년의 번역에 일본어 성경도 참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으로 간 청교도들은 레드컴플렉스에 휩싸였다. 존 로크의 자유와 평등 중, 자유만 가지고 가서 허드슨 강 입구에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고, 평등은 대서양에 빠뜨려버렸다고 루이스 하츠가 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들이 번역한 온갖 종류의 영어 성경들, KJV, NIV 등에 CONTENANCE, FAVORITISM 이라고 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프로레타리아와 싸울 때, 이 23장 3절이 유용했으리라. 절대 왕정제도에서 부르주아와 싸울 때, 모든 권세는 하느님이 주셨다는 구절은 왕에게 유용했다. 봉건제에서 영주들과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소작농들을 다스릴 때도 다시 이 23장 3절이 유용했으리라. 나봇은 왕에게 대항하고 자신의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포도원을 죽음으로 지켰다. 왕이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성경은 구체적 사례를 통해 그러지 않아야 할 때가 있음을 이렇게 명확히 보여주셨다.

성경은 위험한 책이다. 그래서 이단들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 하느님은 성경에 수많은 걸려 넘어지는 돌들을 의도적으로 두신 듯하다. 하나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정의를 먼 길 돌아서도 반드시 이루시는 위대한 왕이시고,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다.

모세 오경의 주저자로 알려지신, 모세가 쓰신 두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나그네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악한 이집트 바로 체제를 벗어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탈출하고, 나라를 이루기 위한 준비들을 해갔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서, 가난하고, 그 권리를 박탈당했던 이스라엘이, 그리고 모세 자신도 그러한 처지에 있었던 지난 세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기들이 태어나자 마자 죽임을 당해야 했던 그 울부짖는 시기에 태어나, 자기 엄마를 엄마라고 마음껏 부르지도 못했던 모세께서, 낮은 자의 편을 편벽되게 들어주지 말라고 쓰셨을까! 게다가 모세 자신이 자신의 민족인 한 사람을 보호해주다가, 낮은 처지의 자기 민족, 그 권리를 박탈당한 한 사람을 보호하려다가, 그를 학대하던 이집트인을 쳐죽인 사건으로 광야로 도망쳐서, 그 쓰라린 40년의 시간을 자기 민족과 떨어져 처가살이했던, 모든 소망이 끊어졌던 삶을 사셨던 모세가,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씀하셨던 모세가, 하나님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모세가, 가난한 자 편을 편벽되이 들어주지 말라고 그 짦은 구절에서 말씀하고 싶으셨을까!

똑같이 모세가 쓰셨다고 보는 신명기에서 다시 반복해서, 모세께서는 15장에서 이와 같이 해서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스스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FAVORITISM을 보이고 계신다. 그 내용은 매 3년 십일조를 통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고, 돈을 꾸어달라하면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말고, 7년째도 못 갚으면, 가난해서 이렇게 갚을 능력이 안되면 아예 원금을 탕감해주고, 이 7년이 가까이 온다고 돈 꿔주는 일을 안해선 안되고, 50년 즉 희년이 되면, 그 전에 가난해서 자기 땅마저 판 사람에게 그 땅을 그냥 돌려주라고 하신 모세는 극도의 FAVIRITISM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다. 이 모세의 법을 따라서 가난한 자와 관련한 재판을 해야 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FAVORITISM으로 가득한 재판을.

이런 재판이 실제 느헤미야서에 나온다.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 중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런 이유가 고리대금이었고, 종으로 팔렸기 때문이다. 이런 호소를 느헤미야에게 하자, 느헤미야는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바로 이런 짓을 그들의 조상들이 해서, 자신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되었는데, 또다시 돌아와서 이런 짓을 하느냐고 귀족과 민장들을 꾸짖었다. 이들은 부자였다.

신명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으면 어떤 벌을 하나님, 하느님께서 내리실지에 대한 예언이 미리 적혀 있었다. 느헤미야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우상 숭배와 동족 착취,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 이웃은 누구인가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이제 다시 정리한다. 성경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사회주의 국가도, 어떤 사회복지국가도 용인할 만한 수준을 넘어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FAVORITISM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모세께서는 자찬하신다. 이보다 공의롭고 큰 법률과 제도체계를 가진 나라가 세계에 없다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체계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그것이 지난 3천년 4천년의 이스라엘 역사다. 잠깐씩 의로운 왕이 나타나서 성공했을 뿐이다.

모세는 미리 예언하신다. 이스라엘이 이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이미 요단강을 넘어가기 전에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7부족이 너무 악해서 그 땅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계 어떤 나라도 이런 공의로운 체제, 법과 제도를 지켜내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FAVORITISM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세계에 보여주셨는데, 많은 나라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 동아시아는 누구 체제와 법률과 제도가 더 공의로운가에 대한 극도의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신도주의. 조선노동당, 중국공산당, 민진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 힘, 자민당, 도쿄퍼스트. 그리고 멀리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태평양을 넘어와서 군대를 배치하고 이 경쟁의 주도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 사상 체계와 그 실험에서 정의가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이 싸움은 이미 다니엘서에서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예언되어 있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FAVORITISM을 가지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모든 나라를 깨부수고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