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2:8-9와 신명기 16:7은 유월절 규례를 행할 때에 고기를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야 하는지에 관한 법이 나와 있다. 먼저 출애굽기 12:8-9의 개정개역 번역은 아래와 같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출12:8-9)
일단 출애굽기를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당시 이들은 고기를 물에 삶아서 먹어서는 안되며 불에 구워서 먹어야 한다. 아마도 시급하게 도망쳐야 할 때에, 거창하게 요리를 해 먹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 본문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본문은 아래와 같다.
וְאָכְלוּ אֶת־הַבָּשָׂר בַּלַּיְלָה הַזֶּה צְלִי־אֵשׁ וּמַצֹּות עַל־מְרֹרִים יֹאכְלֻהוּ׃ אַל־תֹּאכְלוּ מִמֶּנּוּ נָא וּבָשֵׁל מְבֻשָּׁל בַּמָּיִם כִּי אִם־צְלִי־אֵשׁ רֹאשֹׁו עַל־כְּרָעָיו וְעַל־קִרְבֹּו׃
위 히브리어 본문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구문인 צלי-אש (쯜리 에쉬)는 불에 굽는 것을 의미하고 파란색으로 표시한 בשל מבשל במים(바셸 메부샬 바마임)은 직역하면 "물에 끓여서(메부샬 바마임) 요리(바셸)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בשל 동사에는 끓이다와 요리하다라는 의미가 함께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신명기 16:7의 개정개역 번역은 아래와 같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신16:7)
위 번역은 유월절 때 고기를 구워 먹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출12:8-9에 나타난 명령과 모순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래 히브리어 원문을 보라.
וּבִשַּׁלְתָּ וְאָכַלְתָּ בַּמָּקֹום אֲשֶׁר יִבְחַר יְהוָה אֱלֹהֶיךָ בֹּו וּפָנִיתָ בַבֹּקֶר וְהָלַכְתָּ לְאֹהָלֶיךָ׃
한글 번역에서는 "구워라"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히브리어 원문은 בשל 동사 즉, 고기를 (물에 삶아서 하는) 요리해 먹으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유월절에 먹는 고기에 대한 규례가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것은 고정되고 변할 수 없는 원칙은 아니다. 물론, 근본적인 의미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세세한 규례까지도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상황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들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16장에 나오는 절기 규례들은 위급한 때라기 보다는 안정된 상황에서 하나님께 규례를 갖는 의식과 절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고기를 요리해서 먹는 것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유월절 해방 사건은 무교병을 먹는 의식에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모순되어 보이는 두 계명에 관한 문제를 성서의 저자들도 인식을 했던 것 같다. 후대의 책은 역대하 35장에 보면 요시아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하나님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13절은 이 절기 동안 고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에 규례대로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 그 나머지 성물은 솥과 가마와 냄비에 삶아 모든 백성들에게 속히 분배하고
וַיְבַשְּׁלוּ הַפֶּסַח בָּאֵשׁ כַּמִּשְׁפָּט וְהַקֳּדָשִׁים בִּשְּׁלוּ בַּסִּירֹות וּבַדְּוָדִים וּבַצֵּלָחֹות וַיָּרִיצוּ לְכָל־בְּנֵי הָעָם׃
후대 전통에서는 בשל 동사 뒤에 באש(바에쉬, 불위에)를 별도로 붙임으로 이 동사가 불로 요리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이전 문헌에서는 이 의미로 사용되지 않음). 아무튼 위 규례는 유월절 양고기는 출애굽기의 규례를 따라 불에 구워서 요리하고, 나머지 성물은 솥과 같은 도구에 삶으라고 명령하면서 두 종류의 성물이 다르게 취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럼으로 출애굽기와 신명기 어느 전통 하나도 소홀히 되지 않고 있다. 이는 후대의 저자가 모순되어 보이는 전통들을 모두 조화롭게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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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페이스북을 통해 질문주신 내용에 대한 보완 설명입니다(בשל 동사가 본래 포괄적인 의미의 "요리하다"가 아니었을까?)
בשל 동사는 현대 히브리어에서 "요리하다"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그 용례가 좀 제한되었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16:23을 보면 아래와 같이 굽다와 끓이다가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וַיֹּאמֶר אֲלֵהֶם הוּא אֲשֶׁר דִּבֶּר יְהוָה שַׁבָּתֹון שַׁבַּת־קֹדֶשׁ לַיהוָה מָחָר אֵת אֲשֶׁר־תֹּאפוּ אֵפוּ וְאֵת אֲשֶׁר־תְּבַשְּׁלוּ בַּשֵּׁלוּ וְאֵת כָּל־הָעֹדֵף הַנִּיחוּ לָכֶם לְמִשְׁמֶרֶת עַד־הַבֹּקֶר׃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리고 בשל 동사의 다른 용례들을 찾아보면* בשל과 함께 액체 종류 혹은(출34:26; 레6:21; 신14:21) 액체를 담는 용기(민11:8; 슥14:21)와 함께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원문검색에서 다음 쿼리를 입력해 보세요:
word lex_utf8=בש1ל sp=verb
삶아야 하나? 구워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