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밧세바 (설교)

본문: 삼하 12:13

작성: 알파알렙 (kks@alphalef.com)
작성시간: 2019-09-21 15:16:59
조회수: 3479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봄에 있어서 일면만을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청문회라는 것을 합니다. 청문회란 후보자의 여러 면을 보고 평가하는 목적이지만 어느덧 정치적인 위치에 따라 그 사람의 부정적인 면, 혹은 긍정적인 면만을 주장하는 제로섬 게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항상 훌륭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인생은 매우 복잡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윗이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 굉장히 긍정적인 면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신실했고, 훌륭한 통치를 했던 이미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이 다윗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아무런 편견없이 읽게 되면 좀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의 특정한 면만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후대의 평가가 어떠했는지에 관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고대의 역사, 특히 왕에 관한 역사 서술을 할 때에는 보통 힘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당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역사 기록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힘과 권력의 논리가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역사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의 맥락은 이스라엘 역사상, 그리고 지금까지도 메시아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다윗의 허물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 성인급으로 존경받았던 인물들 조차도 스캔들 한 두건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문제는 얼마나 그 사람이 허물을 가지고 있느냐 그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의 허물과 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입니다. 싸이코 패스나 소시오 패스 범죄자들이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완전히 무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범죄나 그보다 더 큰 범죄를 짓게 됩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내가 죄인이라는 의식을 갖는데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죄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죄가 아니라는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르면 죄가 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헤치는 것과 평범한 일상 가운데 사람을 헤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을 헤치는 것은 당연히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상황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허용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헤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전쟁터에서 군복무를 한 사람들이 일상에 돌아와서 큰 트라우마를 겪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치관의 충돌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에 대해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인간은 본래 어떻게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기에 죄의 문제에 대해 무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과 밧세바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이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다윗이 그래도 하나님 앞에 버림받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은 고진감래 끝에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몰락해갔고, 블레셋과의 전투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북이스라엘 지역을 잠시 통치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 역시 몰락했고, 북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에게 투항해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순리 가운데 잘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성경은 다윗이 치루었던 전쟁들의 결과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들에서 승리했고, 주변의 국가들을 제압해 나갔습니다. 그야말로 다윗의 왕국 통일 이스라엘은 오랜 전쟁 끝에 평안함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진짜 문제는 힘들때가 아니라 평안할 때에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다윗에게도 찰나의 틈이 생겼습니다. 한 사람이 큰 죄를 짓게 되는 데에는 처음부터 큰 시험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큰 죄는 작은 유혹으로부터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성 유적지를 가면 어떻게 다윗이 밧세바의 모습을 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심복들은 전부 이스라엘 출신들은 아니었습니다. 외국 용병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에 있었을 당시 다양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도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헷 족속, 즉 히타이트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다윗성 유적터를 가보면 다윗성이 당시 예루살렘 도시에서 가장 놓은 곳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래쪽에 집 유적터들도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 자신의 심복들, 특히 용병 출신들이 자신을 위협할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성을 높이 쌓고 주변에 심복들이 집을 짓고 그 집들을 감시했던 것이지요. 역사를 살펴보면 개국공신들이 왕의 의심을 받아 도리어 숙청을 당한 예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다윗성의 위치와 권력을 잡은 이후의 사람의 심리적인 속성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점차 자신만의 권력을 공고히 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내며 성을 쌓은 것 역시 성경의 전통에서는 그리 긍정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탑을 쌓자고 이야기합니다. 즉, 다윗은 스스로의 권력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스캔들 이야기가 나오는 11장 이전까지 사무엘상의 이야기는 줄곧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쟁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이후 주변의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잠재우고 평안한 시기가 다가 오니까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울이 하나님과 점차로 멀어졌던 과정과 동일합니다. 사울 역시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변질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심복의 아내였던 밧세바의 모습을 보고 그녀와 관계를 맺습니다. 성경은 이 과정 가운데 다윗이 어떤 고민을 했다고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과 힘이라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잠재 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사울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사유화하고 하나님이 자신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주는 왕이 되고 난 이후 죄에 대한 무감함입니다. 죄라고 여겨졌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아무일 없이 지나가겠거니 생각했겠지만 밧세바가 덜컥 임신을 하게 됩니다. 작은 틈이 점점 커지는 모양새입니다. 이 때, 다윗이 짜낸 아이디어는 전장에 나가 전투 지휘를 하고 있던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야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내와 동침을 하게 될 것이고 밧세바가 임신한 것에 대한 아무런 의구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거짓말이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모습과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갖고 부정을 저질렀던 다윗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했던 우리아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우리아를 죽일 결심을 합니다. 본래 부정을 저지른 상관의 입장에서는 원칙을 고수하는 부하가 얄밉게 보였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다윗의 입장에서는 우리아가 다윗과 밧세바의 일을 알고서 의도적으로 밧세바와 동침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아는 자신에게 장차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일러 전투가 가장 격렬히 벌어질 때, 우리아를 맨 앞에 앞세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우리아는 전쟁에서 죽어갔습니다.

다윗 스스로 자신이 가진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해 자신의 부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의심이 우연하게도 밧세바와의 부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윗이 지난 날 사울과 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잊고 완전히 그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다윗에게 감히 그의 부정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측근은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사울이 걸었던 길을 걸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만보면, 다윗왕의 모습은 사울보다 훨씬 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과는 달리 우리에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달은 이후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울 역시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선지자 사무엘이 그 죄를 여러차례 일깨워주었지만 사울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과는 좀 달랐습니다. 우리아가 죽고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이후에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경에서 선지자의 역할은 왕이 자신의 권력을 갖고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왕 스스로 진짜 통치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어쩌면 목을 내놓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꺼냅니다. 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는데, 부자가 잔치를 벌일 때 자신이 소유한 많은 양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자식처럼 아끼는 양 새끼를 빼앗아 잡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분노하면서 그 사람을 처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나단은 다윗에게 그 부자가 당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엄청난 복을 내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독주했던 다윗에게 심판의 선포를 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주었던 사울과의 차이점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죄인줄 알고 참회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만을 주장했고 다윗은 나단의 선포 앞에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연시 여기는 삶의 모양을 그대로 따라 살아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잘 판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제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직접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편견이나 등장 인물에 대한 선입견 없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 가운데 영광과 성공의 장면만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성경은 다윗의 잘못과 악함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라 동일한 성품과 시행착오를 겪는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저지른 죄를 비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평생동안 겪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반란에 시달리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자신에게 대항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함 받은 것과 세상에서 그의 죄의 댓가로 감당해야 했던 책임은 다른 것입니다.

다윗은 그 모든 것을 겪으며 평생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모두는 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근원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하여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돌이킬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진리를 쫓아가는 우리들의 차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