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길 가의 두 맹인-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본문: 마 20:29~마 20:34

작성: 예염 (#205)
작성시간: 2020-03-29 14:16:00
수정시간: 2020-03-30 22:24:07
조회수: 2026



마태복음 20:29-34

29 Καὶ ἐκπορευομένων αὐτῶν ἀπὸ Ἰεριχὼ ἠκολούθησεν αὐτῷ ὄχλος πολύς.

29  그리고 그들이 여리고에서부터 나갈 때에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

ἐκπορευομένων --  ἀπὸ : 여리고를 막 벗어나려는 시점을 표시해 줌.

30 καὶ ἰδοὺ δύο τυφλοὶ καθήμενοι παρὰ τὴν ὁδόν, ἀκούσαντες ὅτι Ἰησοῦς παράγει, ἔκραξαν λέγοντες· Κύριε, ἐλέησον ἡμᾶς, υἱὸς Δαυίδ.

30 그리고 보라 길 옆에 앉아 있던 두 맹인이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듣고 소리지르기 시작하여 말하고 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καθήμενοι παρὰ τὴν ὁδόν : 길 옆에 앉아 있는 두 맹인

  • 많은 사람들의 물결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 인생의 본류에서 비켜서 있는 사람들
  •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태 à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다(34절)

 

ἀκούσαντες ὅτι Ἰησοῦς παράγει :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듣고

  • 맹인은 예수가 지나가고 있는 것을 들은 것이 아니다.
  • 이들은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 이들은 소란한 분위기를 느끼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고 사람들은 이들에게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다.

 

ἔκραξαν λέγοντες

  • 기동적inceptive 의미의 부정과거  

  

δο : 이제까지 존재감이 없던 맹인 두 사람에 주목하는 것.

 

31  δὲ ὄχλος ἐπετίμησεν αὐτοῖς ἵνα σιωπήσωσιν· οἱ δὲ μεῖζον ἔκραξαν λέγοντες· Κύριε, ἐλέησον ἡμᾶς, υἱὸς Δαυίδ.

31 그런데 무리는 그들을 조용히 있으라고 책망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크게 소리 지르면서 말하고 있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변함없이 똑같이 소리지른다: Κύριε, ἐλέησον ἡμᾶς, υἱὸς Δαυίδ. (30,31)

 

32 καὶ στὰς Ἰησοῦς ἐφώνησεν αὐτοὺς καὶ εἶπεν· τί θέλετε ποιήσω ὑμῖν;  

32 그리고 예수는 서서 그들을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느냐?”

 

ποιήσω : (접속법 부정과거 / 직설법 미래)

 

33 λέγουσιν αὐτῷ· Κύριε, ἵνα ἀνοιγῶσιν οἱ ὀφθαλμοὶ ἡμῶν.

33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주님, 우리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33절이 접속사 없이 시작되는 이유는 33절에 예수의 질문에 대한 두 맹인의 대답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Stephen H. Levinsohn, Discourse Features of NT Greek p.236)

 

ἵνα : τί (32)에 대한 응답   

앞에 θελόμεν 이 생략된 것.

 

34 σπλαγχνισθεὶς δὲ Ἰησοῦς ἥψατο τῶν ὀμμάτων αὐτῶν, καὶ εὐθέως ἀνέβλεψαν καὶ ἠκολούθησαν αὐτῷ.

34  그런데 예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들이 다시 보게 되어 그를 따라갔다.”

 

σπλαγχνισθεὶς

  • 내장(σπλαγχνα)에서 유래한 말.
  • σπλαγχνεύω : 제사의식후에 희생제물의 내장을 먹다. 내장을 가지고 예언하다.

 

Κύριε, ἐλέησον ἡμᾶς, υἱὸς Δαυίδ. 대한 예수님의 반응

  • σπλαγχνισθεὶς δὲ Ἰησοῦς ἥψατο τῶν ὀμμάτων αὐτῶν,
  •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내장을 먹는다. 그들의 심정과 완전히 동화되신다.

 

29 Καὶ ἐκπορευομένων αὐτῶν ἀπὸ Ἰεριχὼ ἠκολούθησεν αὐτῷ ὄχλος πολύς.

30 καὶ ἰδοὺ δύο τυφλοὶ καθήμενοι παρὰ τὴν ὁδόν, ἀκούσαντες ὅτι Ἰησοῦς παράγει, ἔκραξαν λέγοντες· Κύριε, ἐλέησον ἡμᾶς, υἱὸς Δαυίδ.

31  δὲ ὄχλος ἐπετίμησεν αὐτοῖς ἵνα σιωπήσωσιν· οἱ δὲ μεῖζον ἔκραξαν λέγοντες· Κύριε, ἐλέησον ἡμᾶς, υἱὸς Δαυίδ.

32 καὶ στὰς Ἰησοῦς ἐφώνησεν αὐτοὺς καὶ εἶπεν· τί θέλετε ποιήσω ὑμῖν;  

33 λέγουσιν αὐτῷ· Κύριε, ἵνα ἀνοιγῶσιν οἱ ὀφθαλμοὶ ἡμῶν.

34 σπλαγχνισθεὶς δὲ Ἰησοῦς ἥψατο τῶν ὀμμάτων αὐτῶν, καὶ εὐθέως ἀνέβλεψαν καὶ ἠκολούθησαν αὐτῷ.

  1. 밖으로안으로

29 여리고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는

34 내장(σπλαγχνα가장 안쪽)에서부터 함께 하는 마음

 

1.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서 떠나가시고 있다.

 

  • 본문의 일 이후에 21:1에 보면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일을 하시고 약 일주일 후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게 되는 일을 앞두고 있다.  
  • 여리고에서 나가시는데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 도시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성문을 통해서 나가시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사람들이 성문앞의 넓은 길을 가득 메우고 있고 상당히 소란스러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 소란스럽게 바삐 움직이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가는 가운데 눈에 띄지 않던 두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원문에는 30절 앞에 보라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 두 사람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데다가 많은 사람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길 가이다.
  • <>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고 이 두 사람은 길 <>이 아닌 길 가에서 걸어가거나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다.
  •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문에서 구걸을 하기 위해 앉아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맹인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면서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지나가시고 있다>고 말해주었고 그래서 두 맹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시고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게 된 것이다.

  • 30절에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라고 되어 있다.

  맹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 아니고 성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가운데 웬만큼 소리를 질러서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 사람은 엄청 크게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므로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 두 맹인은 말 그대로 무조건 소리를 크게 질렀다고 볼 수 있다.
  • 예수님이 이곳을 떠나가시게 되면 이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게 될 것이므로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 사람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지른다.

  메시아로서 자기들을 고쳐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이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일상어였던 아람어로 자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말이다.
  • 자기 자궁 속의 아이를 돌보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을 뜻한다.
  • 자기 자궁 속의 아이를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아끼는 것이다.
  • 두 사람은 자기들을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이와 같이 돌봐달라고 소리지르고 있다.
  • 두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 사람이 아주 크게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를 들은 무리는 이들을 꾸짖고 있다.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 여리고에서 일을 마치고 여리고를 떠나가고 있다.
  • 길이 바쁜데 길 가에 있던 맹인 두 사람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으니 사람들은 점잖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호되게 꾸짖고 있다.
  • 사람은 무리에게 무시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 맹인은 꾸짖음을 당하고 나서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

  31절에,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 당하기 전과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 큰 소리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예수님만 찾고 있다.

 

  • 사람은 눈을 뜨게 해달라고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만 외치고 있다.

  바라는 바를 말하지 않고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말하고 있다.

  •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제서야 머물러 서서 두 맹인을 불러서 물으신다.

 

  1.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 예수님은 왜 답이 뻔한 질문을 하시고 있는가?
  • 이들이 <원하고> 있는지 물으신다.
  • 것은 바라는 것이고 이는 소망과 관련된 것이다.
  • 반드시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 11:1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 없으면 바랄 수 없고 바란다는 것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이들에게 믿음이 있는지 보시는 것이고 그 믿음에 기초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시는 것이다.

 

  • 맹인은 대답한다. 
  1. ,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 자기들이 원하는 것, 즉 바라는 바를 말하고 있다.
  •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이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이들의 원함은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다.
  • 원함은 <믿음에 기초한 소망>이다.
  • 기초한 소망은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 가질 수 있게 하는 믿음은 완전한 100프로의 믿음이 아니다.
  • 인간이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해진다.
  • 없다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 맹인에게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 있었고 자기들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 우리의 믿음의 출발점이고 소망의 근거가 된다.
  •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도 예수님이 없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실은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맹인의 믿음과 소망을 확인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두 맹인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할 때에 한 말과 다른 단어로 되어 있다.
  • 맹인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때에 그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말과 같은 말로, 어머니가 그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아끼는 것을 뜻한다.
  •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할 때에 이 말은 내장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 내장과 같은 이들의 깊은 곳에 있는 괴로움을 살피고 아신 것을 표현하고 있다.
  • 맹인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써 그 믿음과 소망에 사랑이 더해진 것을 볼 수 있다.
  • 13:13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사랑만 따로 떼어서 그것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믿음과 소망이 분리될 수 없게 함께 하고 있다.

 

  • 그들의 눈을 만져주신다.  
  • 행위는 두 사람의 부족한 믿음을 100프로의 믿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믿음을 완전하게 해주고 눈이 뜨게